20180920 목요일 필동분식 by 솜숨씀


퇴근 후 필동분식에서 회동을 가졌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며 일 년 전쯤 쿨하게 퇴사한 루리씨는 일곱 시에 퇴근하는 회사를 다닌다. 지은씨와 함께 우스갯소리로 ‘강남에 있는 대기업 다니는 성공한 동생이 생겼다’며 키들거렸지만 나는 줄곧 그녀의 빠른 결정과 실행력이 놀라웁곤 했다. 나 같은 결정느림보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일. 대단해 정말. 왕창 먹고 진탕 마시겠다는 의지로 지은씨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약국에서 알보칠을 사 발랐다. 서로 할 얘기가 대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나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류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는데 이 퇴사자 모임은 의외로 즐거워서 내심 애정하고 있음. 밝고 목소리 크고 뒷담화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서로를 아끼는 중. 쯧쯧. 게다가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주제에 술을 좋아하는 세 명의 여자들은 소맥을 열심히 말아 마시고 취해서는 김선배까지 불러내 버렸다.  
 
나는 줄곧 선배를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상상하곤 했는데, 이건 아니란 말이야! 주황색 조명 아래 스테이크를 썰며 얘들아 우리 선배야 내가 얘기 많이 했었지? 인사해 같은 대사를 하고 서로 어색한 듯 주뼛주뼛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했다고. 뻔하지만 보편적인. 맥주병과 소주병, 닭똥집이 올라간 테이블 앞에서 취해갖고 벌게진 얼굴로 벌게진 얼굴들에게 선배를 소개하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고! 취한 나를 걱정해 데리러 온 김선배는 또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이런 나를 애인으로 두어 참 고생이 많소.  
 
생각해보면 필동분식에서 함께한 직장동료 둘한테는 술 먹고 취해서 진상 부리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보여줬다. 이분들 핸드폰에 얼굴 벌건 내 사진이 몇몇 장 있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하면 삭제할 수 있을까.  
 
이렇게 흑역사를 차곡차곡 적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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